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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스의 망원경/에세이

나와 글쓰기

언제라도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기쁨을 맛보려는 눈앞에 꿀을 둔 벌의 기쁨을 잠시나마 이해하는 듯한 위선의 혀를 날름거리며 살아간다.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나의 동물적 감수성을 최대한 끌어 올려 새벽 이슬을 맞아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해 보지만 그럴만한 여력이 없어진지 오래다. 나는 12라운드면 끝나는 권투 시합을 아이도 할 수 있는 인생이라는 경기보다도 쉽게 할 수 있다. 예고 없이 날아드는 라이트 어퍼컷을 한대 맞고 넉다운 된다. 항상 그렇듯이 7이나 8정 도의 카운트가 되기전에 일어나리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기에 그리 두렵지는 않지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나의 일상성이 무서울 뿐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호숫가에서의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삶과 나의 라이프(life) - 나는 좋지 않은 의미에만 간간이 영어 단어를 사용한다. - 를 비교해 볼때 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실의(失意)에 빠진다.

인류의 미래와 세계 공영에 이바지하고 뭇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나에게는 마치 통통한 수사슴이 사냥꾼을 걱정하는 것과도 같이 생각된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30톤 선박이 난파되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나라는 존재의 무익성만 가중될 뿐이다. 당장 통일이 된다해도 금강산을 한 번 둘러보는 기쁨이 잠시 있을뿐 다시금 수많은 군중속에 파묻히게 될 것이 뻔하다. 많은 이 들에게 박찬호가 메이저 리그에서 1승을 올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나에게는 한끼 식사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가 배는 더 중요하다. 물론 나도 가끔은 박찬호 소식을 반찬 삼아 식욕을 돋구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삶의 저차원적 의미 - 의식주 같은 것 - 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종종 몇 끼 의 식사를 거르고 남는 이익이 생기면 책을 사서 본다. 육체의 고픔은 참을 수 있지만 정신의 고픔은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대한 민주 시민들' 처럼 교양과 지적 소양을 신으로까지 섬기지는 않는다. 다만 작가가 들려 주는 가슴 깊은 한(恨)을 느낌으로 받아 드리려는 것이다. 탐스러운 사과를 먹기보다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기 원할 뿐이다. 그것의 맛이 어떻든 '내가' 심은 나무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작가의 세계를 나만의 실제 공간으로 만들어 가꾸는 작업을 중시한다. 잘 쓰여진 남의 글을 감탄할 여유가 나에겐 없다. 다만 한가하게 그의 글을 나의 나무로 키울 뿐이다.

누군가 나의 글을 읽더니 군더더기가 많고 난해하다고 한적이 있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사족(蛇足)이므로 내 글이 군더더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러 화려하게 쓰거나 기교를 부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나를 만족시키려는 글을 쓰다 보니 그렇게 보였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내 주위의 누군가가 옷이나 외모에 치장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며 그들의 위선과 의미 없이 내 뱉는 말들에 비하여 적어도 조금은 정직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내 글이 많은 사람의 공통의 정서에 맞지 않다는 사실은 나도 오래 전에 깨달았지만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대규모 공사를 시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가까운 장래에도 그런 작업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대부분 나를 기쁘게 하려는 이기심에 서 나온 것이며 나는 맛없이 보이는 꼴을 마냥 질근질근 씹고 있는 암소처럼 내 글을 질근거리고 싶을 따름이다.